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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최초의 왕조 상나라 이야기.
상나라를 멸망 시키고 등장한 주나라 이야기입니다.
기원전 11세기 경 상나라는 멸망하고
주나라가 중국 중심부를 장악하게 됩니다.
이는 놀랍게도
고고학적으로 증명이 되는 내용입니다.
은허 유적을 비롯한 중국 내 발굴 유물에서
기원전 1040년 경을 전후로 상나라에서 주나라로
유물의 교체가 진행되기 때문이죠
주나라 청동기가 상나라와 다른 특징은
청동기와 유물에 다양한 명문을 새겨 기록을 남겼다는 것입니다
명문에도 그 시기 왕조가 교체되었음을 전합니다.

(목야대전을 기록한 주나라 시기 토기)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망 시킨 목야대전 기록은
무려 한국에도 그 관련 유물이 있습니다.
집에서 보관하던 중국산 화병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목야 대전의 내용을 기록한 토기였다!
이게 국내에서도 발견되어 논란이 된 적이 있죠
연대 측정과 같은 디테일한 부분에서 논쟁이 있지만
학계에선 상나라가 멸망하고 주나라가 등장한 시기를
대략 기원전 11세기 경 즈음이라고
대충 편하게 때려 맞추며 이야기 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주나라는 조상님 고공단보 시절에
삼국지 제갈량이 출사표 던지고 나간 땅인 "기산" 근처
"주원 (周原)"이란 곳에 처음 정착을 했다고 합니다.
'주원'이란 지명 자체가 주나라 근원이란 뜻이니
당연히 원래의 땅 이름은 아닐 것이고
아마 주나라가 발원 한 후 훗날에 붙여진 지명이겠죠
주인(周人) 주족(周族)이 건국 한 나라라는 뜻으로
이름이 주나라인 것입니다.
뭔가 특이하죠 상나라를 '은'이라 부르듯
보통은 지명으로 그 국명을 부르는데
여긴 지명이 아니라 종족명이네요?
네. 일단 주나라를 세운 사람들은
기존의 중국 대륙에 살던 사람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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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경의 <대아.면>에는 주나라 초기역사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古公亶父(고공단보), 陶復陶穴(도복도혈), 未有家室(미유가실)
古公亶父(고공단보) 來朝走馬(내조주마), 率西水滸(솔서수호), 至於歧下(지어기사)”
: 고공단보께서, 토굴 파고 지내셨도다, 아직 집이 없어서라네
고공단보께서 일지기 말을 달려오시어 서쪽의 칠수가에서부터, 기산 밑에까지 이르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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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나라사람은 아마 유목민족이었을 것이고
말을 타고 이동하여 서쪽에 정착한 것이다.
즉 서쪽에서 넘어 온 오랑캐라고 나오죠.
때문에 다양한 상상력이 튀어 나오곤 합니다
주나라 사람을 백인 계통 유목민이다 보는거죠.
왠지 흥미롭고 그럴듯 하죠.
서쪽에서 왔으니 주나라는 백인 유목민이다
이걸 또 그냥 뇌피셜로 주장하는게 아니라
나름 고고학적 유물과 함께 주장합니다.

은허에서 발굴 된 청동인면상입니다.
무릎 꿇고 눈깔 깐거 보니까 (상나라 이야기 참조)
아마도 제물로 곧 죽을 사람인가 봅니다.

반면 주나라 유적에서 나온 주나라 청동인면상입니다.
이렇게 둘이 비교해 보면 진짜로 확 다르죠!
상나라 사람은 눈이 작고 눈깔을 파낸..
주나라 사람들은 눈이 크고 코도 높은 것이
진짜 꼭 서양에서 온 백인 같습니다.
이를 두고 서역에서 온 아리아인 어쩌고
일종의 판타지가 종종 만들어집니다
근데 개인적으로 그냥 전부 억지라고 봅니다
그럼 다음 사진을 보죠

진나라 병마용의 용사 상입니다
똑같은 모양으로 제작된 인형이 없다고 할 정도로
디테일 한 묘사로 유명한 인형이죠
이런 유물을 외관을 두고
단지 주관적 인상 따위로 인종을 구분하면
병마용에 나온 사람들도 전부 백인, 아랍인
아니지 멕시코인으로 볼 수 있겠네요
보세요 콧수염 큰 코를 보면
칠리 소스랑 타코 겁나 잘 먹게 생겼죠.

이건 상나라와 같은 시기에 존재한 문명으로
지금의 사천성(촉나라) 삼성퇴에서 발견 된
유명한 청동인면상입니다.
상나라와 전혀 다른 문명이며
동시대 동아시아 지역에서 황하 문명 이외에도
여러 문명이 동시대 공존했음을 증명하는 대표 유적입니다.
(심지어 요하 문명의 경우 황하문명 보다 오래되었죠)
이것도 주관적 인상 비평에 의지해 추론하면
당시 사천 촉나라 지역에는 외계인이 살았었나 봅니다??
말씀드리면 유물에 나온 형상은 그냥 상징인 것이고
주관적 감상은 결코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이따금 고대사 영역에서 고고학 유물을 두고
상상력을 펼치다 주화입마 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국의 경우 신라 기마 인형을 두고도
이런 종류의 주관적인 인상 비평이 많습니다.
신라의 경우도 신라 흉노기원설과 연계해
토기의 코가 서양인 처럼 큰 것은 북방 유목민이기 때문이다
등등 상상의 나래를 펼칩니다.
특히 조심해야 하는 게 이런 것이죠
그냥 전부 현대인의 상상력일 뿐이고
정확히 말하면 "알 수 없다" 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와서
이주민 출신인 주족은 발원지? 주원에서
다시 동쪽으로 이동해 와서 지금의 시안 부근인
풍읍(풍경)에 자리를 잡습니다
스스로 서백(西伯)'서쪽 백작'이라 하였고
나중에 바로 옆 호경으로 천도하였죠

전부 오늘날 시안 부근의 관중평야 지역입니다
주나라가 상나라와 다른 큰 차이점은
상나라가 약탈, 사냥에 의존한 원시농경 국가였다면
똑같은 도시 국가 수준이지만
주나라는 본격적인 관개 농경을 한 국가란 것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주나라는 자신들의 시조를
농업의 신인 후직(后稷)이라 하였습니다.

과거 한국을 포함 농경 국가의 왕조는
모두 사직단에서 농사의 신에게 제사를 올렸습니다
서울에 있는 사직 공원이 바로 그 흔적입니다.
종묘와 사직을 지키자! 엄근진하게 외칠 때
그 사직이 토지의 신 사(社)와 곡식의 신 직(稷)을 말하고
여기서 직(稷)이 바로 곡식 농사를 처음 알려줬다는
주나라 농사의 신 후직을 말합니다.
바로 주나라 시조입니다.
이런 신화는 주나라의 성격을 분명히 알려줍니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는 황하를 이용한
본격적인 농경 국가의 등장은 주나라 부터란 것이죠.

위 지도가 그 유명한 황토고원의 관중평야입니다.
주나라가 자리 잡은 호경이 위치한 지역이죠
동으로 함곡관이란 험준한 관문이 있고
남으로는 진령산맥이 가로막고 있으며
서로는 진산과 거대한 숲이 펼쳐져 있고
북으로 초원지대로 연결하는 황토지대와
다시 엄청난 규모의 숲이 있었습니다
주나라의 첫 정착지인 '풍경'과
무왕이 천도 한 서주시대의 '호경'은
전부 지금의 시안시 주변에 위치한
역대 왕조가 장안이라 부른 지역에 있었습니다.
이 중요한 관중 평야에 자리 잡은 왕조들은
모두 제국이 되었고 크게 성장했죠
관중 평야가 훗날 제국을 세운 기름진 옥토가 된 건
수백 년 후 전국시대 진나라 시절에 가서야 이뤄진
대대적인 관개 시설 정비 사업 덕분이고
주나라 시절에는 여전히 반농 반유의 경제를 유지하는
황하 범람에 의존한 기초 농업 단계였습니다.
이 지역은 거대한 황하가 만든 주변의 황토 지대로
주기적으로 황하의 범람과 쓸림이 반복되면서
숲이 아닌 평야 지대가 형성된 지역입니다
이 시절은 또한 국경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기 때문에
자연적 여건이 허용하는 한 다양한 민족의 이동이 있던 때죠
농경 민족이 우세할 때는 관개농업을 하며 농사를 지었고
유목민족이 우세할 때는 가축을 풀어서 유목을 했습니다
실제 고고학적으로 관중지역에서 이 시기 발굴 되는 유적에는
농경 다음 유목 다시 농경이 나오며 번갈아 순서로
유목과 농경이 주기적으로 교체된 흔적이 나옵니다
주나라는 유목 문화, 농경문화의 접경지에서
주변의 이런 유목민과의 투쟁을 통해 성장했습니다.
전쟁을 통해 농경 정착지를 지키고 확장하며
농업을 본격적으로 정착 시킨 국가입니다.
위의 그림은 유명한 정전제(井田制)입니다.
주나라 시절에 시행 된 농업 경제 제도로
후대에 나오는 당나라의 정전제(丁田)와는 다른 개념입니다
우물 정(井)자로 땅을 9등분 하여 8개의 사전을 나눠주고
가운데 공전을 함께 농사지어 공전을 왕에게 세금을 냈다는
아주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토지 제도죠
세금을 따로 안내고 백성들이 함께 농사지어
공동 농장 처럼 왕의 땅을 대신 경작했다고 하니
일종의 공산주의? 를 보는 듯 하기도 합니다.
사실 공전이니 사전이니?? 하는 건
우리에게 낯설은 용어가 아닙니다
네 우리가 입시 공부하며 한국사에서 배운
조선 시대 공전과 사전이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조선 왕조는 주나라를 이상적인 국가로 여기며
이를 모방해 현실 유교 국가를 구현하겠다고 만든 나라죠
조선은 주나라 정전제를 그대로 시행은 못했지만
대신 비스무리하게 정전제를 적용했으니
경기도 토지를 공전으로 그 외 토지를 사전으로 정한
과전법이 바로 이 개념의 일부 가져온 것입니다.
물론 살짝 변형해서 이름만 공전이고 사전이고
주나라와 다르게 죄다 백성 수탈 하며 뜯어먹었다는
약간의 사소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기록에 나오는 주나라 정전제가 진짜 시행된 제도인지는
지금 그 누구도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이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건.
1. 주나라는 농업중심의 국가였다.
2. 주나라는 정전(井田)이란 개념을 알듯 경지를 정리하는 관개 농업을 했다.
정도입니다.
그리고 이런식의 농업에 올인 하는 고대 국가의 경우
평화로운 방식의 주변 통치가 가능하단 장점이 있습니다.
상나라의 경우 부족한 농업 생산력을 보충하기 위해
반드시 주기적인 주변부 약탈과 살인을 필요로 했지만
농업 국가인 주나라는 안 그랬거든요
전쟁 보다 중요한 게 사실 치수 사업이고 노동력입니다.
(하나라 궁전? 유적 복원 모형)
앞서 연재 한 상나라 이야기에서
하(夏)나라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음을 말하며
그 왕조는 아마도 주나라의 정통성을 위해
주나라가 창작했을 것이다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일단 기록에 나온 하 왕조의 시조는 우임금으로
황하의 치수사업을 통해 왕이 된 인물입니다.
어라? 뭔가 익숙한 스토리죠
또한 황하 서안 지역에 정착하여
농업으로 첫 왕조를 세운 인물입니다
어라? 뭔가 익숙한 스토리죠
당시 관중 평야 지역은 서쪽 변방으로
기존 중국 문명의 땅이 아니었고
주나라는 서쪽에서 온 오랑캐에 불과했지만
하 왕조라는 새로운 창작 신화로 인하여
1. 서쪽 관중 지역도 중국 문명의 땅이다
2. 상나라가 하나라를 멸망 시켰듯
주나라도 상나라를 멸망 시킨 것이다
이런 당위성이 부여가 됩니다.
역사책에 나오는 하나라와 상나라의 마지막 역시
하나라의 말희, 상나라의 달기 이야기 처럼
ctrl + c + v 복사 붙여넣기 마냥 똑같은 이유죠
더불어 중원 지역을 화하의 땅이라 여기고
주변의 사방을 오랑캐의 땅이라 여기는
이런 이념적인 화이사상 정의와 구분도
모두 주나라 이후에 등장한 것이니
딱 나까지만 문명 나머진 오랑캐! 이런 논리가 되죠
하 왕조 신화는 주나라 건국 후
상당 기간이 흐른 후 의도적으로 만들어 진
다분히 정치적인 창작 설화가 아닌가 추정 합니다
일단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킨 힘은
상나라의 약탈과 폭력을 못 견딘
주변 이민족과 연합해 달성한 것이라 봅니다.
역사책에 나오는 주나라 문왕에 대한 각종 핍박
그리고 상나라 주왕의 폭정과 잔인함의 내용 등이
바로 이런 상황에 대한 기록이겠죠
주나라는 이를 바탕으로 동쪽으로 진격해
상나라를 멸하고 막대한 영토를 얻었습니다.
당연히 도시 국가 수준에 불과한 주나라는
이런 넓은 지역을 다스릴 능력이 없습니다
중앙 집권 제도와 같은 광역 행정 시스템을
아직 인류가 발명 하기 전의 일입니다.
또한 이 시절의 도시와 도시들 여러 성읍들은
그 사이에 자리 잡은 거대한 숲과 정글로
서로가 떨어져 있는 일종의 점과 같은 지역들이죠
청동기 시절의 도구는 석기와 목기입니다.
돌과 나무로 큰 나무를 벌목 할 수 가 없죠
당시 인류는 큰 숲을 개간할 수 없었습니다.
도시를 연결하는 길은 자연이 만든 길입니다
때문에 각 중요 지점들에 주나라 출신의
가족, 친척들을 봉작해서 각자 다스리게 했으니
주나라 봉건제라고 합니다.
고대 국가는 모두 이런식의 도시 국가들이 형성되고
다시 도시 국가를 연결하는 봉건제 형식을 취하며
점진적으로 광역 국가로 나아가게 됩니다.
상나라도 일종의 봉건제를 실시 했고
이후 서양에서도 중세에 봉건제를 실시했는데
주나라의 봉건제가 이들과 다른 차이점은
주나라는 죄다 가족들이라는 것입니다.
왕에서 부터 제후에 이르기 까지
적자는 대종으로 그 외는 소종으로 삼고
소종도 다시 대종과 소종으로 나뉘며 세분화 되어
체계적으로 혈연이 지역 전체로 상호 이어 집니다.
이런 종법제도 개념은 가족 안에서 큰집과 작은집을 구분하며
지금도 족보를 확인하는 한국인에게 익숙한 제도죠
서양의 봉건제가 봉사를 약속하는 쌍무계약 관계라면
주나라의 봉건제는 혈연적 유대감으로 이뤄진 관계조
이 혈연 관계를 예법으로 제도화 한 것이
"종법제도"입니다 지역을 통치하는 방식이죠
이와 비슷한 봉건제 사례가 러시아에서 나타납니다
러시아의 류릭왕조 혈통 공후들이 그러합니다.
키예프 루시 성립 후 루스지역 광범위한 지역에 흩어져
같은 류릭 혈통이란 관념을 모두가 공유하며
러시아 광활한 토지의 통치를 하였던 시기가 있죠
물론 진짜로 이들이 혈연이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각 지역으로 분파된 주나라 문화권 국가들이
자신들을 같은 혈연 같은 동류로 인식했다는 것입니다
중화와 이민족의 구분도 주나라 시절 자리 잡게 됩니다.
귀하신 혈연 지배층은 정복자로 성을 쌓아 성읍에 살고
피지배층은 성밖에 살며 빵셔틀이 되죠
도시 성읍(城邑)에 살면 그게 국인(國人)이고
도시 밖에 살면 그게 야인(野人)입니다
이 당시 국민은 성안에 사는 사람을 의미했습니다.
도시 국가로 주로 토성으로 구축한 성읍 안에는
대부를 비롯한 사인(士人)들이 살며
유사 시에 전차를 타고 전쟁에 나가곤 했습니다.
이들은 평소 육예(六藝)라고 하여 문무를 익히는게
국민의 의무를 다하는 일종의 사인 계층 의무였습니다.
서양의 기사들 처럼 말입니다.
이렇게요
한편 국가의 국력을 위 그림에 나오는
수레의 숫자로 나눴다는 말이 있습니다.
천자인 왕의 경우 만승(萬乘)지국
제후의 경우 천승(千乘)지국
대부의 경우 백승(百乘)지국이라 부릅니다.
물론 진짜로 수레가 만대가 있단 말이 아닙니다
무슨 수레 1대당 보조인원이 8명이네 어쩌고 하며
당시 군사력의 숫자 어쩌고 뇌절 하는 경우가 있는데
전부 의미없는 삽질입니다 그냥 일종의 관용어구죠.
천자인 황제는 만(萬)이란 숫자로
제후는 천(千)이란 숫자로 표현한 것으로
주나라가 아닌 전국시대 맹자의 기록에 나온 말입니다.
의미는 그냥 그만큼 중요하고 많다는 뜻이죠
비슷한 관용구로 삼천(三千)이란 말이 있습니다
고대 기록이나 표현에서는 관용적으로
그냥 무지 많다는 보통 "삼천"이라 표현합니다.
의자왕의 삼천궁녀가 대표적이죠
진짜로 의자왕이 삼천명의 궁녀를 두었다고
단순히 이해하면 큰일 납니다.
해당 기록은 문학 '시'에서 나왔어요
당연히 '많다' 라는 "형용사"입니다.
예를 들어 할리 아재가 "뚝배기 억수로 맛있네예~"했다고
진짜로 뚝배기를 1억번 먹었다고 계산하며
"아니! 이렇게 먹다니 미쳤네..마약을 진짜로 했군..."
이딴 결론을 내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돌아와 주나라 이야길 계속하면
상나라를 정복하고 이런 통치체제를 세운 주나라는
상나라와는 근본부터 전혀 다른 나라였습니다
민족이 다르단 건 앞서 말했고 당연히 언어도 달랐습니다.
오늘날 상나라와 주나라 기록을 담은
상서(尙書)를 지금도 번역 하는게 힘든 이유가
상나라와 주나라가 같은 상형자를 썼음에도
두 기록은 그 언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유로 갑골문 역시 해독하는데
과거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갑골문의 해석을 주나라의 갑골문 격인
금문(金文)을 통해서 해석 하거든요.
주나라와 상나라는 서로 모시는 신(神)도 달랐습니다.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하고 이를 교체를 했습니다.
상나라 시기 나오는 갑골문에 따르면
상나라가 섬기는 신은 제(帝)입니다
과거에 죽은 왕들이 곧 신이 되는 개념입니다.
이들이 워낙 영험 하여 후손들에게 영향을 끼치니
명절 마다 조상님 제삿상에 인신공양을 올립니다
때문에 상나라의 왕은 왕인 동시에 신으로
일종의 제정 일치의 신정 국가였다고 여깁니다
어라? 조상신이라는 개념이 어쩐지 익숙하죠
유교에서 말하는 조상신 개념 때문입니다.
유교를 만든 공자가 바로 상나라 유민 혈통이고
공자는 어려서 제사 지내는 것을 즐겨했죠
상나라의 예법과 종교는 유교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반면 주나라의 경우 신神은 사람이 아니라
바로 하늘 천(天)입니다
레알 농업국가의 위엄이 여기서도 보이죠
때문에 왕의 존재는 신이 아니라
하늘의 뜻을 대신해 농업을 주관하는 자로
하늘의 아들 즉 천자(天子)인 것입니다
종교적 의미로의 조상님 숭배에서
하늘 숭배로 대상이 바뀐 것은 물론
주나라 시기에 이르면 제정일치의 사회를 탈피해
인문적인 가치와 이성, 정치 이념을 담은 것으로
보다 발전된 사회가 구축되었단 뜻입니다
구정의 신화도 그래서 나오죠
천자는 천하를 주관하기에
천하를 9개로 나눠서 그 지역을 상징하는
아홉개의 솥을 두어 국가의 보물로 삼았습니다
이를 구정(九鼎)이라 합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기록으로
구정이 하나라 시절 만들어진 보물이라 하지만
당연히 구라고 아마도 춘추, 전국시대 즈음
창작되어 유포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각각의 표면에는 지역의 지리와 문화를 담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고 하죠
상나라 시절 사람을 잡아 제물로 쓰는데 사용한 솥은
이제 그런 목적이 아니라 일종의 정치적 의미를 담은
상징적 용도로 바뀌었단 뜻이기도 합니다
상나라에서 주나라로 교체되며
신앙 중심에서 보다 이성적인 국가가 되었죠
그 의미를 알수 있는 대표적 사례가 기록입니다
훗날 춘추 전국시대 사람이 배반하고 죽이는게
매일 벌어지고 패륜이 일상이 된 참혹한 현실에서
공자는 과거의 주나라를 이상향으로 봤습니다
보다 인문학적이고 이성적인 삶을 지향한
주나라의 정치 제도와 통치 방식이야 말로
가장 이상적인 사회 제도라고 찬양를 했죠
공자는 일 평생 주나라 시절을 그리며
나 다시 돌아갈래~!!를 외쳤죠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그렇게 했습니다.
주나라 제도를 세운 "주공"을 가장 존경했습니다
바로 그 공자가 주장하고 만든 것이
주나라의 제도와 예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이를 따라 주나라식 예절을 지키자 라는 학문입니다.
유학(儒學)이
수다V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