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 무사를 생각하면 흔히 철릭을 입고 환도를 찬 채 혼자서 검술을 익힌 무사를 떠올린다.
하지만 이런 이미지는 일본의 검술 문화와 무사물의 영향을 받은 현대 매체의 이미지가 상당히 섞여 있거나,
그나마 검의 중요성이 좀 대두된 조선 후기 이미지에 가깝다.
실제로는 대충...



이렇게 활을 쏘거나, 아니면 말타면서 활쏘는 궁수 느낌에 더 가깝다.
그나마 근접 무기를 좀 껴주자면...

기껏해야 이렇게 창 든 이미지에 가깝다. (임진왜란 초 동래정 정병 구현 사진)
이렇게 검사보다는 궁병에 훨씬 가까운 느낌이였고 그나마 껴주자면 창병이다.
그러니까, 주로 들고 다니는 무기들이 검보다는 활, 창, 화살통등 이런 느낌이다.

(중국의 무기 사진. 물론 병종마다 다르긴 하지만, 창과 활, 특히 활을 가장 많이 썼다는건 팩트다.)
그럼 이유를 알아보자.
1. 일단 조선은 적을 상대로 백병전을 할일이 많지 않았다.
조선의 군사적 위협은 시기에 따라 달랐지만, 전기에는 특히 북방의 여진족과 남쪽의 왜구가 중요했다.
그중 북방에서는 빠른 기병을 이용한 기습과 약탈에 대응해야 했다.
따라서 조선은 단순히 성 안에서 버티는 것만이 아니라 척후, 기병, 궁술, 화약무기 등을 이용해 대응했다.

(여진족 무사의 이미지. 우리가 생각하는 야만전사가 아니다. 만주에는 쇠가 많았다.)
이렇게 기동력이 빠른 이들을 상대로 보병을 운용해 검이나 병장기 쓸 이유? 없었다.
2. 조선의 병사 운용 체계에 대해 알아보자.
조선은 대규모 진법을 이용한 화력투사전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주력은 화약무기와 활, 그리고 기마병이였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준비한 병사의 비율. 사수와 기병의 비율이 매우 높다. 팽배수나 살수는 적다. 투사무기를 보호, 보조하는 수단에 가까웠다.)

(한때 유명했던 만령전투 영상. 당시 한반도 전투 트랜드가 니가와 + 대규모 화력 투사였다.)
고로 이런 화력 투사나 기병 운용을 위해서 대규모 병력을 진법과 신호체계로 통제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이 소규모 전투를 무시했다는 뜻은 아니다.
세종대에는 여진족과의 실제 전투 경험을 반영하여 『진도지법』과 『계축진설』 같은 진법이 만들어졌다.
여기에는 행군, 결진, 척후, 기병 운용 등 실제 북방에서 필요한 소부대 전술이 포함됐다.
또, 주로 여진족을 상대했던 체탐인들을 보면 10명의 소규모로 운용했다.
그리고 이렇게 여진족과 소규모 유격전을 할때에는 기동력이 빠른 기마병이나 사거리가 긴 궁수가 유리했다.
그러니까 결론을 내리자면 대규모 진법과 함께 소부대 기동, 척후, 기병 운용을 함께 사용했다.
즉, 검이나 근접 병장기가 낄 자리는 많이 없었다.
3. 조선에서 병사들에게 주로 가르켰던 훈련은 궁술과 기마술 위주였다.
궁술은 상당히 중요한 기본 군사훈련이었다.
실록에는 습사를 정기적인 군사훈련으로 실시했다는 기록이 반복해서 나타나며, 무과에서도 활쏘기가 중요한 종목이었다.
기마무예도 마찬가지다. 기사뿐만 아니라 삼갑사, 삼갑창, 모구, 격구 등의 기록이 세조·성종대에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특히 삼갑사는 단순히 과녁을 쏘는 경기가 아니었다.
세 부대가 말을 타고 움직이면서 정해진 상대에게 활을 쏘는 모의전 형태였고, 삼갑창 역시 기마 상태에서 부대끼리 창을 사용하는 모의전이었다.
정확히는 궁술과 기마술 같은 군사기량은 중요하게 다루면서도, 이를 개인의 일기토보다는 진법과 집단전술 속에서 활용하는 방향을 중시했다고 보는 편이 맞다.
그냥 간단하게 대충 조선시대에 중요하게 생각 했던 훈련만 나열해 보겠다.
강무, 열무, 타위, 격검, 갑을창법, 삼갑사, 갑을사, 모구, 기추, 기사지적, 마상재, 격구, 보사, 농창, 육량시, 마상재 등이 있는데.
대부분 사냥 + 진법 훈련이나 활쏘기, 말타고 창질이나 활쏘기다.
격검? 실록에 몇번 언급도 안된다.
애초의 조선전기의 훈련 방식 자체가 애초에 말타기, 활쏘기에 치중되어 있다는 뜻이다.
병장기나 검술등 개인 무예가 아니라.
4. 무과 시험 과목이 궁술과 기사술의 비중이 컸다.

조선 전기 무과를 보면 검술 하나를 중심으로 무인을 선발한 것이 아니라, 궁술과 기마무예가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했다.
기사(騎射)처럼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종목이 있었고, 보사(步射) 역시 중요한 시험 종목이었다.
여기에 기마술과 궁술에 관련된 여러 무예가 함께 시험되었다.
즉 조선 전기의 무과는 현대 매체에서 흔히 떠올리는 '검객 선발 시험'과는 거리가 있었다.
활을 잘 쏘고 말을 다루는 능력이 조선 무인에게 중요한 기본기였다,
따라서 조선 전기 무사의 대표적인 무예를 꼽는다면 검술이나 병장기 보다는,
궁술과 기마무예를 먼저 보는 것이 당시의 군사제도와 더 잘 맞는다.
5. 애초에 병장기가 다양하지도 않음.
(조선 전기 병장기 종류. 진짜 간단하다. 창, 방패, 그리고 환도. 끝.)
보통 무술이 발달하거나 호신술이 나라들은 다양한 형태의 병장기가 많았다.
일본하고 중국만 봐도 엄청나게 다양하다.
조선 전기의 병장기는 임진왜란때 명나라에서 무술을 수입한 후대에 비해, 또 타국에 비해 종류가 많지 않았다.
장검·창·팽배·모·겸 등 비교적 단순한 병장기가 주류였으며, 다양한 형태의 개인무기가 체계적으로 발달하지 않았다.
애초에 운용 자체가 병장기 위주보다는 원거리 투사 위주로 운용하는 방식이 중심이었다.
(일본의 존나게 다양한 병장기 및 호신용품들)
6. 팽배수나 격검도 있거든요? 에 대한 반박
팽배수나 격검 같은 훈련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방패와 창·검을 사용하는 병종과 훈련도 있었고, 검술 역시 군사기술의 일부였다.
다만, 궁술이나 마상 무예에 비해서는 훈련량에 대한 기록이 적다. 즉 중요성이 떨어졌다.
애초에 위의 임진왜란 병종 비율을 보면, 정말 윈거리 투사 병력을 보호하는 보조적인 역할에 가까웠다.
근데 마치 이것을 조선군 전체의 대표적인 무예라고 확대하거나 조선이 근접전도 강했다고 확대 해석 하는 사람들이 있다.
현재 확인되는 기록에서는 궁술과 기마술에 비해 검술 개인기나 격검이 훨씬 강하게 제도화되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결론 :
일본이나 중국에서 무기 수입하기 이전, 조선전기의 무사는 검객이라기보다 궁수·기마병·진법 운용병의 성격이 강했다.
결국 임진왜란 이전 조선의 무사는 일본의 사무라이처럼 "검을 중심으로 싸우는 무사"라기보다는
활과 말을 다룰 줄 알고, 진법과 신호에 따라 부대 단위로 움직이며, 필요하면 소부대 기동전에도 대응하는 군인에 가까웠다고 보는 것이 맞다.
조선 전기에 검술과 도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비중도 작고 그것이 조선군의 중심 무예였다고 보기도 어렵다.
궁술과 기마술의 비중이 훨씬 컸다.
참고 문헌 :
조선시대 방어 전략과 전술 : https://contents.history.go.kr/front/km/view.do?levelId=km_014_0050_0020_0010_0010
조선시대 개인 무예의 쇠퇴 : https://contents.history.go.kr/front/km/view.do?levelId=km_014_0050_0020_0010_0020
격검 : https://contents.history.go.kr/front/km/view.do?levelId=km_014_0050_0010_0020_0060&whereStr=%40where+%7B+IDX_TITLE%28HASALL%7C%27%EA%B2%A9%EA%B2%80%27%7C1000%7C0%29+or+IDX_CONTENT%28HASALL%7C%27%EA%B2%A9%EA%B2%80%27%7C100%7C0%29+or+IDX_ALL%28HASALL%7C%27%EA%B2%A9%EA%B2%80%27%7C1%7C0%29+%7D
체탐자, 정찰자 :
http://www.postnews.kr/cpost_life/sub_read.asp?cate=21&BoardID=11660
필자도 전문가가 아니라 반박 환영
수다V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