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엔 유교적 효를 중요시하던 사회였기에 죽은 부모의 묘지인 유택을 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특히 풍수지리상으로 명당에 뫼시는 것을 최고로 쳤는데 문제는 이 명당이란게 한정되어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렇다고 아무데나 모시는 것도 당시 사회상으론 상종못할 금수 새끼 판정을 받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사망 판정까지 받을 수도 있었다.
특히 자신들이 양반이라면 더더욱.
더불어 이 묘역은 금령이라고 하여 무덤을 쓴 자의 소유권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부동산 알박기의 일환으로도 사용된다.
여기서 나오는 임산물의 소유권도 묘주에게 있기에 이만저만 큰 이득이 아니었다.
다른 집안이 와서 우리 무덤을 뽑아버리거나 인근의 나무를 베어가기라도 하면 바로 집안간 데스매치가 시작된다.
사회적 위신과 경제권이 긴밀하게 연결된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런 산송은 주로 지방의 유세있는 집안이 자기보다 급떨어지는 집안을 닦아버리려고 할때 주로 벌어졌다.
돈 있는 집안이 다짜고짜 묘지를 털어버리면 상대 집안은 기둥뿌리를 뽑아서라도 대응을 해야하는데
금력과 인맥이 후달릴시 부모 묘지도 못 지키는 병신 낙인이 찍힌다.
당연히 지역 양반가 전체에겐 답도 없는 호구새끼로 찍혀서 조리돌림 당하는건 기본이었고...
요컨대 산송이 단순 풍수지리적 미신과
효심에 국한된게 아닌
경제권 + 명예 + 권력이 복합적으로 얽힌
양반 가문들의 파워게임이었고
수십년, 넘어서 백년 넘게 소송이 벌어지는 일이 허다했다
서양으로 영지 싸움을 선산으로 했다고 보면 되겠다
이는 곧 조선 전역을 무덤 전쟁으로 끌고갔고
야밤에 남의 집 무덤을 누가 털어버리면
그 집 자손은 꼭지가 돌아 곡괭이 들고
산에 가서 침략자의 알박기를 파내는
수라도가 펼쳐졌다는 소리다.